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문단 편집) === 일차원적 인간 === 선진산업사회에서는 물질적 번영이 점차 확산되어,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로 지목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없어진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렇진 않을지 모른다. '배고픔과 비참함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종속과 타락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구원에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노동자와 그의 고용주가 동일한 TV프로그램을 보고 동일한 휴양지를 방문한다는 것이 계급의 소멸을 말한다기보다는, 체제의 유지를 위한 욕구가 그 체제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은 노동자가 억압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보다 더 많은 노동을 통하여 그의 고용주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어렵게 획득한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노동의 양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점은 고용주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욕망의 양에 비례하는데, 그런 욕망을 대중문화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과잉노동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문화가 광고하는 상품에 대한, 노동자들의 '일차원적'인 욕망 추구가 광범위하게 퍼진다. 그 결과, 부유한 서구의 선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자동차, 세탁기, 구김 없는 옷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품에 집착하여 정작 자신의 진정한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정신적으로는 매우 빈곤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비재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자동차, 하이파이 스테레오세트, 복층 집과 부엌용품 등에서 찾는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34] 일차원적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한 개인이 될 자유가 없다. 마르쿠제의 주장에 의하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억압하는 사회의 특수한 이해관계 속에서 개인 각자에게 부여된 '거짓 욕구'만을 붙잡고 산다. 광고와 대중문화는 그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뇌하고 조작한다. 우리는 TV, 영화, 인터넷 등등에서 모두 예외없이 이러한 상품 소비주의에 묶여있다. 상품은 거짓에 익숙해져버린 우리의 허위의식을 부풀리고, 상품에 담긴 주입식 의미들은 어느새 우리에게 삶의 방식으로 고정된다. 우리는 자유로워 보여도 사실 어디서나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현란한 광고에 우리가 계속해서 속아주는 한,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쿠제는 일찍이 『에로스와 문명』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혁명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9년 뒤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더 이상 전복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존 억압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서술한다. 즉, 일차원적 사회에서 성적 쾌락은 이제 억압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성적 노출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성적 매력 마저도 또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구속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사무실의 섹시한 판매 여성들, 잘생기고 신체 건강한 젊은 관리인과 매장지배인은 시장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품들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면 심지어 지위가 별로 높지 않은 직종의 경력조차 수월해진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40]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이제 오히려 우리가 성적 만족으로서의 섹스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몸과 생활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에로스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성적에너지(에로스)는 단순한 섹스에서의 쾌락으로만 드러나서는 안 되며, 좀 더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며 미학적인 사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승화'는 억압사회가 개인에게 포기하라고 강요한 것을 의식하게 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해방을 향한 욕구도 유지해준다. 그는 여기서 마음속에 예술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일차원적 사회에서 예술과 같은 승화 활동은 본래 현존 질서에 저항하는 낯선 것이다. 이 예술은 현실을 비난하고 반박한다. 하지만 예술은 현실의 거짓과 왜곡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저항의 역할을 할 뿐, 기술사회에서는 지배적인 체제 속으로 다시금 포섭된다. 이러한 예술은 상업화되어 상품으로 팔리며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는 대중문화의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제에 따르면 결국 해방의 단초는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 예술은 역설적으로 "억압에 고개를 수그리면서도 억압을 좌절시킬 수도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질서를 교란시켜서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마르쿠제는 그것이 사회에 대한 '부정', 즉 '저항'에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억압과 지배의 형식들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그러한 힘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저항예술을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Great Refusal)"[* 이 단어는 초현실주의 미술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 빌려온 용어이다.]라고 부른다. 그는 이 거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마르쿠제는 이 용어를 베트남전쟁에 대한 거부, 핵무기철폐운동, 신좌파와 히피문화, 학생운동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이런 저항은 "게임의 법칙을 위반하는 기본적인 힘이며 법칙위반을 통해서 게임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50] 그리고 마르쿠제는 "사람들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며 여기에 희망을 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